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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생활일기 20208

주재생활일기 06. 떠나는 날, 돌아가는 날.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날도 언젠간 온다. 6개월 동안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로션을 세 통, 치약을 두 통 썼다. 손톱을 몇 번 깎았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먹은 나시고랭 끼니 수도 헤아리기 힘들다. 칼리만탄에는 여덟 번 갔고 발리에는 한 번, 족자카르타는 두 번, 반둥과 말랑, 메단에도 한 번 다녀왔다. 내 앞에는 배워야 할 것들, 배우고 싶은 것들이 수 없이 많았고 그 첫 단계는 물론 인도네시아어였다. 인도네시아어가 정말 배우기 쉽고, 인도네시아어 화자들이 그만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언어 습득자에게 큰 축복이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은 사실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100센티 자로 두면 겨우 0.5센티 길이로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참 깊은 시간이었다. 아 참 나는 다시 돌.. 2020. 4. 2.
주재생활일기 05. 인도네시아 외국인 입국 금지령 3월 마지막 날, 이민청장의 발표가 공표되었다. 땅땅땅. 법정도 아니니 진짜 망치를 치지는 않았겠지만 충격은 그보다 더했다. 4월 2일 0시 부로 인도네시아는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을 거부한다. 단 KITAS나 KITAP 소지자 등 은 예외로 한다고 한다. 오늘 주 인도네시아 대한민국 대사관에 올라온 내용을 보면 입국이 허용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1. KITAS/KITAP (인도네시아 내 체류증) 소지자 2. 외교/관용 비자 또는 체류허가 소지자 3. 의료, 식량지원 등 인도적 목적으로 방문하는 자 4. 육로/항만/항공 수송기 종사자 5. 국가전략사업에 참여하는 외국인 이상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입국이 허가된다. 이 조치는 코로나로 인한 혼란이 가라앉고 안전해질 때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참으로 기약없는.. 2020. 4. 1.
주재생활일기 04. 왜곡 오피스텔에서 나와 호텔 생활을 한지 벌써 3주차.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출장자가 줄었다. 대부분의 고객이 출장자(특히 한국인)로 구성된 이 호텔도 썰렁해졌다. 주말에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면 조식당 앞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수영장에 물결하나 없다. 오늘도 조용한 식당에서 혼자 미고랭을 먹고 있는데 수상한 한 쌍이 들어왔다. 남자는 한국인이고 여자는 젊은 현지인이었는데 분명히 아버지 뻘은 될 법한 남자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런 쌍을 처음 본 건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마음이 안좋았다. 뒤이어 들어온 현지 가족이 있었는데 여자는 어린 여자아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고향에 두고 온 딸 생각을 하시는지, 자기 어렸을 때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2020. 3. 22.
주재생활일기 03. 나의 집 다르마왕사 101 2019년 10월 11일, 아 아니다. 2019년 6월 말 어느 때 즈음 이 호텔에 처음 묵었다. 첫 해외 출장을 나왔을 때, 자카르타 숙소가 이곳이었다. 우리 법인은 자카르타 출장자들을 대부분 이곳에 묵게 했고, 나도 그에 따라 몇 박을 지내게 되었다. 그 때의 기억은 생생하지 않다. 무더운 칼리만탄과 자카르타, 단지 지나가는 인연인 줄로 알았을 뿐이다. 계절이 바뀌는 10월 즈음 다시 다르마왕사 101 호텔방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열심히도 인니어 인사말을 외웠다. 장기출장을 당했기 때문이다. 다르마왕사 장기 투숙객으로 지낸 지 세 달 정도. 식당과 로비 직원들이 내 이름을 알고 인사해 주는 것이 신기했다. 경제적 여건 때문에 아파트로 옮기는 날, 이상하게도 나는 또다시 집을 떠나는 것 같았다... 2020. 3. 11.
주재생활일기 02. 세 번째 로션 2020년 3월 8일 일요일 아침에 샤워를 하고 익숙한 로션 뚜껑을 열어 뒤집는 순간, 로션이 다 떨어진 것을 깨닫는다. 이상하다. 첫 로션은 다 쓰는데 무척이나 오래 걸린 느낌인데, 두 번째 로션은 금방 다 써버리다니. 그것도 자카르타 그랜드 인도네시아에 있는 이니스프리에서 산 미백 로션인데... 나는 이제 어떻게 미백을 하나 고민도 잠시, 남은 로션의 영혼까지 끌어모아 바르고 새 로션을 사러 나갔다. 지금은 다르마왕사 101 호텔에서 머물고 있어서 호텔에 붙어있는 쇼핑몰에서 로션을 구할 수 있다. 몇 번이나 로션들을 들었다 놨다 고민한다. 미백.. 나에게 필요한 것은 미백이다.. 이미 너무 타버렸지만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나의 피부를 더이상 어두워지게 놔두지 않겠다. 첫 번째 로션보다 훨씬 빨리 다.. 2020. 3. 9.
주재생활일기 01. 자카르타 자카르타에서 산지도 벌써 5개월이 지났다. 5개월이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간이기도 하고 여차저차하다가 아차차 하면 지나가 버릴 시간이기도 하다. (하기야 올 해가 벌써 2개월 지났다고 하면 말 다했다.) 나는 장기 출장자로 자카르타에 파견되었다. 3월에 돌아오기로 기약한 6개월짜리 출장은 올 해 말까지로 연장되었다. 첫 한 두 달은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날씨, 새로운 사람들에 적응하느라 급류를 탔다. 나는 여행을 워낙 좋아하지만 자카르타는 뉴욕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만에 모든 명소를 다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기로 했다, 나는 감히 2020년을 유복한 유배 시기로 생각하고자 한다.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고, 잘 써서 보여주기로 했다. 올해 .. 2020. 3. 8.
다시 블로그에 글을 쓰게 된 경위 2020년 3월 8일 일요일 아침밥을 먹으면서 다음에 읽을 책을 고르고 있었다. 어제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다 읽어서 자연스럽게 발터 벤야민을 찾았다. (한국어로 된 종이책을 살 수가 없기 때문에 태블릿으로 yes24 북클럽과 교보ebook을 이용하고 있다. 전자책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주재생활을 보람차게 보낼 수 있었을까 싶다.) yes24에서 발터 벤야민의 글을 엮은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 라는 책을 발견했다. 바로 다운받아서 차근히 읽었다. 현대미술과 사진에 대한 철학 책들을 읽으면 나의 무지함에 아득하다. 사진을 취미로 하면서 겪는 상황들과 사진들, 그에대한 생각을 이토록 깊게 해놓은 사람들이 이미 수십년 전에 글을 써 놓았다. 그 글, 그 맥락을 이해하기엔 미학, 철학에 대.. 2020. 3. 8.
글쓰기와 블로그 사진은 2018년 프라하 가는 비행기 안에서. 티스토리를 오랜만에 열어보았다. 마치 책장 맨 아래칸 10대 때 모아온 상자를 열어보는 것 처럼. 내 기억속의 블로그의 모습과, 2020년에 열어본 블로그의 모습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생각보다 열심히 사진을 올리고 글을 썼다. 갑자기 티스토리에 로그인 하게 된 이야기로 일기를 쓰면 A4용지 한바닥은 족히 채울 것 같다. 실체가 있는 글은 붙이고자 하면 계속 늘어난다. 아무튼 나는 다시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더 정돈된 방법으로 기록하고 싶다. 내가 스물 일곱 해를 살아오며 나를 진단해 보건대, 나는 그 천성이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 지가 중요한 사람이다. 혼자서 쓰는 일기를 올해 초부터 간단히 쓰고 있다. 그것은 문장이라기보다는 사실과 느낌의 나열이었.. 2020. 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