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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생활일기 2020

주재생활일기 04. 왜곡

by EHhyun 2020. 3. 22.

 

2019, 자카르타

오피스텔에서 나와 호텔 생활을 한지 벌써 3주차.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출장자가 줄었다. 대부분의 고객이 출장자(특히 한국인)로 구성된 이 호텔도 썰렁해졌다. 주말에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면 조식당 앞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수영장에 물결하나 없다. 

오늘도 조용한 식당에서 혼자 미고랭을 먹고 있는데 수상한 한 쌍이 들어왔다. 남자는 한국인이고 여자는 젊은 현지인이었는데 분명히 아버지 뻘은 될 법한 남자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런 쌍을 처음 본 건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마음이 안좋았다. 뒤이어 들어온 현지 가족이 있었는데 여자는 어린 여자아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고향에 두고 온 딸 생각을 하시는지, 자기 어렸을 때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볼수가 없어 얼른 시선을 핸드폰으로 돌렸다. 

마침 그 커플은 나와 통유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식사를 했다. 내가 오해하는 것일까봐 이따금 멀리 보는 척 바라보았다. 어떤 장면에서 남자는 담배를 태웠고 어떤 장면에서 여자는 손하트를 보여줬다. 사실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정말 사랑하는 사이이고 나아가 국제 결혼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여자가 아이에게 보낸 시선만큼은 분명했다. 또 하나, 자카르타엔 믿을 수 없을만큼 만연한게 성매매이고, 주요 고객층 중 하나는 한국인 남자라는 것 또한 분명했다.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그리고 n번방, 박사방이라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서 퍼지고 있었다. 기사를 읽고 한 번 분노했다. 더러워서 읽기가 어려웠다. 텔레그램 삭제니 초기화니 하는 검색어가 상승하는 상황에 또 두 번째로 치를 떨었다. 나는 분노에 기대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여러모로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남발하는 국민청원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분노가 아니면, 이렇게 깊숙히 박힌 쓰레기들을 제거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 식당에서, 나는 세 번째 분노했다. 나는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주변에 박혀서 자라난 암적인 존재들을 분노로 태워버리지 않는다면, 저절로 나아가는 세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