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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격리일기 2020

자가격리일기 11. 4월 15일 수요일 (브래이킹 배드, 피터 드러커의 자기경영 노트)

by EHhyun 2020. 4. 16.

2018, 샌프란시스코

4월 15일 총선일이자 11일차 격리일이다. 오늘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퍼져 인류가 위협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놀라운 의료수준과 행정력으로 대응중인 대한민국에 감사하는 내용을 좀 적고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가격리진단 어플리케이션으로 현재 상황을 입력한다. 대표 증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고열, 기침, 인후통 을 체크하게 된다. 오전 중에 전화 한통이 온다. 구청에서 나를 담당하시는 공무원께서 전화를 주신다. 두 분인 것 같은데 주말이나 오늘같은 선거일에도 빠짐없이 전화를 하신다. 증상체크를 하시고 외출 여부를 검사하신다. 올바른 시민이라면 밖에 안나가는 것이 맞으므로 나도 당연히 계속 격리를 지키고 있다. 오후 1시가 되면 어플리케이션을 켜서 다시 같은 증상체크를 한다. 구청 주무관님은 몇 시간 내로 또 전화를 하셔서 같은 내용을 물어보신다. 하루에 두 번씩, 몇 명일지는 알 수 없지만 자기 담당 자가격리자들에게 전화를 거시고 같은 내용을 계속 반복해서 물어보아야 하는 일. 모르긴 몰라도 감성 소모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본업이 전화를 돌리는 일은 아닐 텐데, 전화로 체크하는 일이 시간도 뺏어가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친절히 말씀드리고 최대한 빨리 끊어드리려고 한다.

그래서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
1. 자가격리 14일이 끝날 때쯤에 한 번 더 진료를 받아야 하는 것인지,
2. 자가격리 시작일로 부터 15일차까지 격리 대상일이던데 정확히 언제 끝나는지
를 물어보아야지 하고 마음먹다가도 막상 전화가 오면 까먹고 놓친다. 오후에 전화하시면 그때 물어봐야겠다. 생각하고 또 놓친다.

결국 오늘 투표를 하고 나서야 물어보았는데, 
1. 자가격리 14일 경과 후 검진은 다시 받을 필요는 없다. 와
2. 입국자의 경우, 입국 당일은 1일차로 치지 않고, 다음날로부터 14일차 24시까지 격리 대상이다. 를 답변으로 들었다.

그러니까, 토요일에 입국하였으면 2주 뒤 토요일 24시까지 격리하고, 일요일에 외출이 가능한 것이다.
아무튼 다같이 싸우고 있는 의료진, 공무원 여러분들에게 감사하고 자랑스럽다. 기업에만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에는 더 큰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오늘의 책: 피터 드러커의 자기경영노트
아주 딱딱하고 졸린 책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잘 읽힌다. 이제 막 신입사원 1년 생활을 벗어난 사람으로서 내가 몸담은 조직과, 드러커 선생이 소개하는 조직의 모습이 자꾸 겹친다. 보면 볼 수록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나의 위치에서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리더의 위치에 있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에 대해서 계속 돌아보게 된다. 사실 20년 가까이 된 책이지만 요즘 나오는 경영 자기계발서적을 읽기 전에 그 기초를 다지고 싶어서 선택했다. 꽤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경영의 1요소를 시간관리로 꼽으신다. 요즘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자가격리한답시고 시간을 너무 막 쓰고 있다. 매일 밤까지 일기쓰고 책읽느라 12시를 넘겨서 잠이 든다. 문제는 늦잠을 잔다는 것이다. 회사 출퇴근 생활로 돌아간다면 더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을까봐 겁이 난다. 좋은 습관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할 수 없다는 습관조차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해야 할일을 압축해서 할 수 있는 자기경영을 실천하다.

오늘은 앞서 말한대로 선거일이다. 나라에서는 투표의 권리를 보장해주어서 자가격리중인 나도 1시간동안 투표소로 짧은 외출을 나갈 수 있었다. 감히 비교할 수 없겠지만 교도소에서 외출을 받은 모범수가 된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외투를 입었다. 주머니가 깊어 지갑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을 까먹고 가방을 메고 나갔다. 외투를 입은 내 모습이 훨씬 나은것 같다.

현관을 열자 시원한 봄바람이 불었다. 벚꽃은 이미 다 져서 도로와 보도블럭에만 날리고 있었지만 용케도 목련이 아직 붙어있었다. 투표소인 노인정까지는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라 투표 전후에 시간이 무척 남았다. 투표소 봉사자분들도 자가격리자 명단에 내가 있는 것을 아시고 먼저 전화를 주셨다.

투표소 앞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는데 한 아저씨가 투표 결과 어떨것 같냐고 물어보셨다. 하릴없이 투표소를 바라보고 있으니 나를 출구조사원인 줄 아신 모양이다. 글쎄요.. 하니까 대충 들었을것 아닙니까 하신다. 얼버무리고 투표소로 들어갔다. 체온재고, 소독하고, 장갑을 끼우고 차근히 투표를 하였다. 사람이 없기도 해서 일사천리로 하고 나왔다. 잠시 걷고 싶어서 집까지 가는 길을 만끽했다. 어디 편의점에서 맥주라도 사갈까 하다가 어떤 상점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곧장 집으로 왔다. 잠시의 외출이지만 감사했다. 감사함을 느끼게 만드는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