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가격리일기 2020

자가격리일기 09. 4월 13일 월요일 (브레이킹 배드,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by EHhyun 2020. 4. 13.

2018, 도쿄

한주의 시작 월요일, 사실 자가격리의 일상은 그렇게 다이내믹하지 못하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격리한다는 것이 그래도 큰 축복이라고 생각해서 문 너머를 통해서라도 시간을 함께 쓰고 싶다. 안방에 갇혀 있는 생활에는 요리의 자유, 일조의 자유, 조망의 자유 등 많은 것이 없다. 그래도 더 큰 행복이 분명 함께하고 있다.

최근에 읽은 어느 책에서 당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면 이미 부모님과 보내는 시간의 80%를 사용한 것이라고 하더라. 물론 미국의 이야기라서 우리네 사회와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한국 사회도 점점 이와 같아지지 않을까 싶다. 시간이 아깝다, 시간이 없다, 고 하는데 도대체 그 시간을 아껴서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현명한 사람들은 현재에 집중하라는지, 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라는지 조금씩 알게된다. 그런 면에서도 이번 14일은 특별하다. 초등학교 이후로 이렇게 집에 오래 있어본 적이 있었던가. 2주일은 고사하고 3일이상 있어본 적이 없다. 계속 이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지만 대학교 기숙사에서 한 학기, 일본에서 한 학기, 인도네시아에서 6개월씩 간헐적 자취도 했었다. 

집에서의 생활이 감사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언제 다시 나갈지 모른다는 것과, 영영 나가버릴 때가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이렇게 오래 집에 박혀있는 것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초등학교 때처럼 부모님이 일터에서 오시는게 기다려진다. 느지막히 오셔서 저녁식사를 한밤중에 하더라도, 차려주시는 저녁과 대화가 있어서 저녁밥은 꼭 함께 먹으려고 한다. 다 큰 자식이 부모님이 차려주시는 밥만 기다리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 행복을 지켜드리고 싶다.

열흘간 길러온 수염을 깎았다. 예상대로 많이 자랐고 거의 망우삼림 사장님 스타일이 되었다. (사장님 존경합니다.) 오늘 인도네시아와 컨퍼런스콜이 있었는데 차마 마스크를 끼고 방에서 화상회의를 할 수 없어서 깎아버렸다. 인증샷을 남겼다. 근데 의외로 스노우에 필터 쓴거랑 다르지 않아서 앞으로 기르지 않아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영화: 는 스킵했다. 요즘 보고 있는 미드 브레이킹 배드 리뷰를 남긴다.
잔인한거 잘 못보는데 이 미드는 굉장하다. 각종 상을 휩쓸었다는 명성에 걸맞는 드라마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이 상황이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해가는지, 인물과 배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작은 선택과 결정들이 얼마나 큰 결말을 만드는지 빠져들어서 보게 된다. 지금 시즌 3까지 왔는데 매 화가 롤러코스터를 탄다. 다음 전개를 전혀 상상할 수 없고 모든 인물들의 심리가 처절하게 이해가 가서 몰입도도 높다. 어떻게 결말이 마무리될지 너무나도 궁금하지만 스포가 무서워서 찾아보지 않고 있다. 이번 격리기간 동안 시즌 3을 뽀개는 것이 나의 작은 즐거움이다.

오늘의 책: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손에 잡은지 이틀만에 다 읽어버렸다.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라고 분명 어제 써 놓았는데 이렇게 단숨에 읽어버리다니... 후반부 에서 인터뷰한 인물 중에서 기억에 남은 인물은 유홍준 선생님과 김형석 선생님. 군 복무하면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다 읽었다. 외박때는 혼자 삼년산성에 찾아가기도 했다. 휴가를 나와서 교토로 혼자, 두 번이나 여행 갔던 것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4권의 영향이 지대했다. 이전에 서점에서 유홍준 선생님을 인터뷰한 다른 책도 본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선 채로 다 읽어버렸다. 유홍준 선생님은 답사기를 쓸 때, 열전을 쓸 때 한 꼭지 분량을 염두에 두고 쓰신다고 한다. 사실 이런 치밀함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에게는 더이상 치밀함이라고 불릴 수 없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일일테니까. 미술사학자로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문화재를 통해 대중에게 다가고자 했던 그분의 시도는 나를 이토록 여행하게 만들었다.
김형석 선생님은 올 해 진짜 100세가 되셨다. 책 [백년을 살아보니]는 다음에 꼭 읽어야 할 책 목록에 고이 올려놓았다. '인격의 핵심은 성실성이다.' 이 말은 두고두고 곱씹을 말이다. 얼마 전에 읽은 [페스트] 에서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할 일은 양심에 따라 성찰하고, 연대하고, 성실히 자기 본분을 해내는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자기의 일인지 성찰하는 과정에서 바로 철학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소개된 노인의학자 마크 E. 윌리엄스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전체 책을 멋지게 갈무리한다. '노화는 사실 허상이다.' '습관에 매달려 편협하게 사는 것이 판단력을 흐리는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인생의 경험과 지혜를 가득 풀어놓은 이 책의 끝에는 이렇게 전혀 몰랐던 진짜 어른이 되는 방법이 있었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 답답하고, 불통의 노인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쪽만 열린 소통은 없다. 젊은 사람들부터 마음을 열고 지혜를 청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가이자 인터뷰어 김지수 선생님처럼 질문해야 한다는 것을. 
김지수 선생님의 질문 뽑는 솜씨도 예술이다. 여러 어른들의 답변을 보면서도 감탄했지만 그 대답을 끌어내는 작가의 능력도 이미 어른의 경지라고 느껴졌다. 20살이 되면 성인이 되지만 어른이 되는 건 다른 일이다. 나도 어른이 되기위해 부단하고 성실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 책은 앞선 어른들의 따뜻한 손짓으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