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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격리일기 2020

자가격리일기 07. 4월 11일 토요일 (아이리시맨, 페스트)

by EHhyun 2020. 4. 12.

2018, 샌프란시스코

자가격리를 시작한지 일주일을 넘겼다! 기간이 주어진 생활을 하다보면 결국 우리의 삶도 그 기간들의 확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사용하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손쉽게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같은 질문을 던질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이 그림자 속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상태라면 시간을 쪼개는 것은 항상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또다시 확인한 교훈은, 주말을 빠르게 보내려면 늦잠을 자면 된다는 것이다. 이제 방구석 생활에 어느정도 적응을 해서 공허한 낮시간을 보냈다는 생각도 들지만, 무엇보다 늦잠을 자버렸더니 오전이 없어졌다. 하기야 워낙 대하영화(이런 표현이 있나..?)를 관람해서 시간이 금방 가버렸으려나.

오늘의 영화: 아이리시맨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 30분, 미국의 50~70년대를 조명하는 대작 영화, 아이리시맨을 보았다. 평일에 보기에는 시간이 없어서 일부러 주말을 골랐는데 잘한것 같다. 워낙 영화가 길고 내다루는 사건, 내용이 많아서 모두 요약하기에는 어렵다. 로버트 드 니로는 프랭크 시런이라는 등장 인물의 인생을 기가 막히게 표현해냈다. 특히 주인공인 그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내는 내외부적인 마찰과 감정이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마지막 장면, 이제 크리스마스냐고 물어보는 노인 프랭크는 곧 크리스마스라는 신부의 답변에 문을 닫지 말아달라고 한다. 프랭크의 부인 아이린은 그가 퇴소하고 2개월 뒤인 12월 23일에 죽었다고 했는데, 나는 여기서 강조하지 않은 잔잔한 로맨스와 애잔함을 느꼈다. 영화는 프랭크를 신사적인 사람으로 그린다. 충동적이고 다혈질인 마피아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침착하고 인정적인 사람이다. 그가 어떻게 트럭 운전사에서 필라델피아 마피아 2인자의 위치까지 올랐는지, 어떻게 미국의 어두운 현대사에 관여했는지 영화는 느린 호흡으로 보여준다. 그 장중한 흐름이 우아한 노년들의 마피아 영화를 전개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준다.

오늘의 책: 페스트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다 읽었다. 결론적으로 페스트는 오랑에서 사라졌다. 페스트가 퍼져나감에 따라 오랑 시민들과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반응을 보는 것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요 포인트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따로 있었다. 타루라는 인물과 코타르라는 인물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인물로 나타난다. 둘 다 서술자에게 고백하기를 자기의 삶은 페스트에 걸린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두 인물이 페스트를 대하는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타루는 조심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옮길 수 있는, 너무나 익숙한 비도덕을 경계하는 인물이다. 판사였던 아버지가 범죄자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것을 보고 집을 나오게 된다. 그 후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최상의 폭력, 그것을 정당화 시키는 사형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며 살아간다. 페스크가 퍼진 오랑에서는 페스트나 사형제도나 다를 것이 없으나, 페스트에는 적극적으로 방어할 채계가 있다는 것, 자신이 그 역할을 한다는 것에 의욕을 가진다. 그러나 막바지, 페스트가 다 사라질 즈음에 페스트로 죽게 된다. 소설은 영웅주의가 아닌 성실함이 페스트를 몰아내는 길이라고 하지만 그의 모습은 어딘지 영웅스럽다.
코타르라는 인물은 범죄를 저지르고 가택 연금 중이었는데 페스트가 퍼지면서 경찰력이 분산되자 그 틈이 만족스러운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이 페스트의 공포심에 떨고 있다는 사실괴 마치 자신이 가택연금으로 공포심을 느꼈던 것을 동질화하여 은근한 기쁨을 누린다. 페스트가 잠잠해 지는 것을 못참을 정도였다. 결국 페스트가 물러가고 경찰에 연행되고 만다.
진찰받기를 거부하며 죽어간 신부, 한 문장을 6개월 동안 고치다가 죽음에 문턱에서 그 문장을 태워버리고 모든 형용사를 떼어버린 아마추어 작가, 이방인으로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누구보다 열심히 병의 확산을 막은 기자, 모두가 흥미로운 인간 군상들이었다. 페스트가 끝나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노인은 서술자 리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페스트를 이겼다니, 페스트가 무엇입니까? 결국 삶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