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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격리일기 2020

자가격리일기 10. 4월 14일 화요일 (헤일, 시저!, 톨스토이 단편선)

by EHhyun 2020. 4. 14.

2018, 샌프란시스코

자가격리 10일차, 점점 다짐들이 무너지고 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늙는다는 말이 이해되어간다. 오늘은 자택근무도 설렁설렁했는데 이렇게 일하는 것은 나와 맞지 않는가보다. 차라리 바짝 일하고 편하게 쉬는 것이 내타입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동안 정지해놓았던 영어학원이 자동으로 재개 되어서 목요일에 온라인 수업을 하기로 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만든 여러가지 사회 현상중에 주목할 만한 것으로 사람들의 관성을 깼다는 점을 들고 싶다. 이전까지도 광범위한 온라인 수업, 온라인 미팅이 가능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대면을 선호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비대면이 강요된 사회에서 직접 비대면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 이것이 이 질병이 불러온 역사의 변곡점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요새 점점 많은 좋은 것들이 귀찮아지고 있다. 사실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는 것이지만, 하지 않을 때 후회하는 나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을 읽고 많은 내용이 머리에 남았는데 원래 인생이란 것이 작은 투쟁의 연속이라는 점이 또 나를 움직인다.

오늘의 영화: 헤일, 시저
코엔 형제가 만든 가벼운 풍자 영화. 코엔 형제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만 만드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도 있다니 반가웠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와도 약간 겹치는 것이 50년대의 할리우드 제작사를 배경으로 한다. 조지 클루니, 조쉬 브롤린, 스칼렛 요한슨, 틸다 스윈튼.. 이름만 들어도 쟁쟁하신 배우들이 유쾌한 연기를 선보인다. 배우와 캐릭터만 봐도 재밌는 영화가 있는데, [헤일 시저]도 그 축이다. 가만 보면 사회 풍자적인 장면들이 아주 대놓고 가감없이 나온다. 종교계 풍자, 공산주의자 풍자, 심지어 영화계 자체도 아프지 않게 꼬집는다. 연기력 부족한 낙하산 꽃미남 배우와 과거가 복잡한 여배우, 멍청하지만 대중에게 잘 포장되어 보여지는 대배우까지. 할리우드에서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보여지는지 과장된 전개로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더 가볍다. 정말 멍청한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과장 좀 보태서 찰리 채플린들이 영화의 전개를 이끌어 나가는 느낌? 와중에 조쉬 브롤린이 맡은 주인공 타노스.. 아니 에디 매닝스는 마지막 부분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든 스탭들을 욕보이지 말라는 한마디로 관람객의 마음을 울린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요즘 꽂혀있는 인생의 척도는 성실성이다. 아닐까 싶다.

오늘의 책: 톨스토이 단편선
열린책들 세계문학에 담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열어보니 톨스토이 단편선이었다. 모르는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자기전에 조금씩 읽고 있는데 단편문학의 재미를 알아가는 것 같아 기쁘다. [습격], [세바스토폴 이야기], [홀스또메르], [신은 진실을 알지만 때를 기다린다], [카프카스의 포로] 이렇게 다섯편을 읽었다. [홀스또메르]는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과 은근히 겹쳐 읽혀서 잔잔한 울림이 있었고 [신은 진실을 알지만 때를 기다린다]는 고등학교 때 읽고 펑펑 울었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비슷한, 짧고도 강력한 북받침이 있었다. 톨스토이의 단편에는 짧은 분량에도 인생이 들어있는 느낌이다. 드넓은 시베리아 툰드라와 같은 공간적 광활함도, 머리가 세는 수십년의 세월이라는 시간적 아득함도 짧은 이야기속에 녹으니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 계속 남겨진 이야기가 기대된다.

내일은 투표날이라 한 시간의 짧은 외출이 허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