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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격리일기 2020

자가격리일기 06. 4월 10일 금요일 (아메리칸 셰프, 페스트)

by EHhyun 2020. 4. 10.

2018, 샌프란시스코

자택근무로 금요일까지 여차저차 왔다. 내일은 마음껏 빈둥댈 자유가 주어지는 주말이다! 작년 주말은 주로 놀러가고, 약속잡아서 사람들 만나고 하느라 집에서 박혀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작년만 그럴까, 자카르타로 떠나기 전 나의 주말에서 집이 차지하는 비율은 잠이 차지하는 비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는 사람 없는 자카르타에서의 생활과, 돌아와서 2주간의 자가격리가 나에게 '집에서 보내는 생활'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단순히 떠나는 데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돌아오는 길, 그 길이 주는 즐거움과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서 떠올리는 행복감. 나에게 여행은 그 모든 과정을 다 포괄한다. 

6개월간의 긴 여행(이라고 쓰고 출장이라고 읽는)을 다녀와서 집에 붙어있는 2주는 그래서 나쁘지 않다. 비록 계절이 벚꽃 날리는 철이고, 그 계절은 유난히도 짧아 2주면 그 분홍은 가고 없겠지만. 오래 돌아다니며 지평을 넓혔으니 이제 깊어질 시간이 필요한 참이었다. 이 시기를 타서 나는 더 깊어지려고 한다. 성장의 길은 때로 가시밭길이지만 그 풍경은 아름답다. 

오늘의 영화: 아메리칸 셰프
예전에 비행기에서 자막없이 보다가 다 못봤던 영화인데, 가볍게 보기에 유쾌하고 즐거운 영화였다. 특기할 점은 기승전결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다. 극 초반에 발단과 같은 위기가 발생하고 영화는 자연스럽게 미끄럼틀을 탄다. 그래서 보기에 편안하다고 느껴진다. 단, 존 파브로가 굽고 볶고 지지는 각종 식재료와 요리들이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미각적으로도!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치맥과 함께했다. 거추장스러운 로맨스와 신파적인 가족주의 없이도 자연스럽고 열린 모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서 더욱 좋았다. 마이애미부터 뉴올리언스, LA에 이르는 미국 남부 로드트립의 느낌 한 꼬집에 그에 걸맞는 쿠바, 멕시코풍의 음악 한 큰술까지. 화려한 레스토랑 정식은 아니어도 끝내주는 맛의 쿠바노 샌드위치 같은 영화였다.

오늘의 책: 페스트, 알베르 카뮈
[이방인]을 예에에에전에 읽었었다. 줄거리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린 나이에 이해는 되지 않았어도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를 읽다가 더 오래두고 읽고 싶어서(지쳐서) [페스트]로 갈아탔다. 당연하게도 전세계적인 판데믹 광풍이 불고 있는 이 시점에, 카뮈 같은 거장은 전염병에 걸린 사회를 어떻게 묘사했을까 궁금해졌다. 몰입감도 더 느껴지는 것 같고. 지금 3장을 다 읽었는데 묘사가 정말 절절하다. 카뮈는 정말로 페스트에 걸린 사회를 방문한 것일까? 작중 '서술자'라고 지칭하는 서술자는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진실된 객관은 허구인 것, 그가 강조하는 부분에서도 일말의 주관을 느낄 수 있는데 그 주관이 실제 페스트 사회에 몸담은 인물의 모습같다. 마치 현재의 우리를 보는 것 같다. 파리 출신으로 오랑에 취재를 왔다가 꼼짝없이 갇힌 한 기자가 등장인물로 나오는데 자카르타에서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감정이입이 기가막히게 잘 되었다. 나는 빠져나와서 서울에 있지만 그는 아직 봉쇄당한 오랑에 있고 탈출을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미 체념의 단계로 들어간 오랑 시민들이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