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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격리일기 2020

자가격리일기 04. 4월 8일 수요일 Day 5. (빅뱅이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EHhyun 2020. 4. 8.

2017, 뉴욕

살아있는 유기체가 그렇고 과학에서 말하는 한 시스템이 그렇듯이 입력이 있어야 출력이 있다는 것. 글쓰기도 그렇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다만 '나' 라는 작가적 함수가 어떤 글을 출력하는데에 있어서 입력민감도가 얼마냐인 것이 소재나 현상을 포착하는 능력일 것이다. 많은 천재적 작가들은 이것을 영감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아직 입력을 몇배 키워서 출력을 과하게 뱉어낼 작가적 생산성이 부족한 것 같다. 

오늘은 왠지 지난 4일간의 다짐과 노력이 싫어졌다. 몸과 마음이 그놈의 항상성을 지키고자, 변화를 막고 서있었다. 일기를 쓰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영화를 매일 보는 것조차 마치 의무감과 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은 영화를 안봤다. 그것만으로도 꽤 신선한 변화가 느껴져서(나는 참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즐거웠다. 어제는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도 쥐어 짜내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술술 써질 때와 비교하면 당연히도 유쾌하지 못하다. 그 불쾌의 기억탓에 오늘 블로그도 건너 뛸 뻔했다. 영화를 스킵한 대신에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자카르타에서 혼자 살때는 자기계발을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남았다. 알차게 쓰고 싶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자가격리중인 이제 알았다. 가족과 함께 산다는 것의 가치와 행복을. 무엇을 위해서 자기계발을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가. 결국 가족이, 집이, 사랑이 주는 행복이야말로 개인적인 시간들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소중한 가치이다.

잠시였지만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고 난 후, 글이 써지는 날과 써지지 않는 날에 대해서 쓰기로 하였다. 이미 수많은 작가들이 경험한 주제일 것이다. 혼자 살면서 여러권의 책에 빠져있을 때에는 글감이 넘쳐났다. 쏟아놓고 싶은 글이 많아서 정리하는 것이 일이었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 낮까지의 나는 글을 짜내고 있었다. 전업 작가라면 글을 짜내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강제성이 없는 만큼 포기하기도 쉽다. 

가족과의 여유로운 시간은 '글쓰는 나'에게도 여유를 주었다. 반 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는 시각을 주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잘 읽히지 않는다. 작년에 읽었다면 90%를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지금은 한 50% 정도 아는 것 같기도 하다. 역사, 철학의 역사가 발전한 순서대로 위대한 지성들의 생각을 엿보아야 하나 싶기도 하다. 어떻게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공표하는지, 영혼과 이성과 육체를 구분하는 생각을 강하게 비판하는지, 그 전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먼저 알아야 하나 싶기도 하다. 대학교 다닐때 좀더 관심있게 보았더라면 철학 강의도 수강해보는 것인데 아쉽다. 나름 공대생 치고 교양강의를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읽히지 않는 책이 나의 독서 의욕을 살짝 꺾어놓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일단 무작정 읽어보자. 배움의 과정에 고통이 없으면 그것은 완전한 배움이 아니다. 무리해서 산을 한번 오르고, 다음에 오를 때에 주변 경치도 즐기고 다른 등산로를 타기도 해 보자.

오늘의 영화는 휴식이다. 대신 빅뱅이론과 브레이킹 배드를 보았다. 빅뱅이론 시즌7 에피소드6 을 보고 있는데 하워드가 버나데트에게 기념일 이벤트로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 나온다. 멋지고 감동적인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긴 호흡을 가진 시트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이었다.